일직선의 눈동자 (一直線の瞳)

분류 |

W | 감귈

THEME | 실험우유

WITH | 마논, 우쥬

※ 주의: 인체 실험, 신체 절단, 고통 묘사  

 

 

 흰 손가락이 부드럽게 클​램프를 열었다. 투명한 관을 따라 노란 수액이 아래로 흘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삿바늘이 연결된 실험체의 숨이 고르게 흩어졌다. 잠이 들었으리라, 점차 느려지는 심박수 그래프를 지켜보던 연구원은 조용히 작은 스툴을 끌어와 앉았다. 그의 손에는 몇십 장은 되는 기록지들을 두툼히 철한 파일이 들려 있었다. 절반 정도는 닳고 구겨진 옛날 것이고, 절반 정도는 쓰지 않은 빈 기록지였다. 그러나 쓰지 않았을 뿐 완전한 새것은 아니었다. 맨 위에 얹힌 빈 기록지에서도, 어떤 칸들은 이미 반복된 압력으로 선명한 흰 글씨가 남겨진 채였다. 

 그는 그 위에 펜을 대고 자국을 따라 또다시 익숙한 글자를 적었다. M-N44, 담당자 요시이 우쥬. 심박수를 재는 기계의 규칙적인 신호음이 어절마다 떨어졌다. 한때 우쥬는 이 소리를 무척이나 거슬려했었다. 예전에 그가 맡고 있던 실험체는 신호음이 빨라질 때면 형편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곤 했으니. 그건 쇳소리 같은 신음을 냈고, 성질이 고약했고, 아마 못생겼고, …… 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사실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쥬는 관심 없는 것에 대한 기억을 오래 간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자리는 대신 다른 좋은 것들에 대한 기억으로 채우는 편이 훨 나았다. 이를테면 M-N44를 새 실험체로 데려왔던 날 같은. 

 

 

 그날은 주마다 있는 실험 보고 날이었다. 우쥬는 최근 진행한 연구 일지와 그나마 쓸만한 결과들을 챙겨서 복도를 걷고 있었다. 이번에 그가 의심했던 발현 단백질은 예상과 달리 재생 과정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도 결과라고 보고해야 했다. 영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던 중, 문득 자신을 보는 어떤 시선을 느꼈다. 옆을 돌아보자 회복실 유리창 너머에서 붉은 눈동자 하나가 우쥬의 자색 눈동자와 일직선 거리를 이뤘다. 다른 쪽 눈은 쓸 수 없는지 거즈로 덮인 채였고, 유리 위로 얹힌 팔에는 자잘한 테이프 자국이 보였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녹빛 머리칼은 얼마나 길었는지 창을 통해 끝을 확인할 수 없었다. 영락없는 실험체의 행색을 하고서 소녀는 바깥의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우쥬에게 남의 담당 실험체에 허비할 관심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유라면 얼마든지 댈 수 있었다. 아직은 예정된 시각까지 여유가 조금 있어서, 엉망인 결과를 가지고 회의실에 가기 싫어서, 혹은…… 그저 그 실험체가 눈길을 끌었기 때문에. 

 “…….” 

 그렇다고 그곳에서 무언가 한 건 아니었다. 약속이나 한 듯 둘은 그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유독 느리게 흐르는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 짧게 다물린 입술이 우쥬에게는 꽤나 귀여워 보였던 것 같다. 앙상한 어깨는 다소간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고. 그는 실험체에게 어떤 행동을 취하는 대신, 무심결에 회복실의 호수를 확인했다. 담당 연구원이 누구인지 흐릿하나마 기억이 났다. 지금쯤 우쥬와 같은 목적지로 향해 가고 있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그는 마침내 다시 발걸음을 떼어 걷기 시작했다. 보고 회의에서 할 말이 하나 생겼다. 흰 가운 자락이 복도에서 자취를 감출 때까지, 소녀의 눈은 줄곧 그 뒤를 따랐다. 

 

 

 M-N44는 눅눅한 침대에 누워서 아까 전에 봤던 연구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창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는 일은 오래전에 그만둔 버릇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날따라 연구소는 조용했고, 새삼스레 견딜 수 없이 무료함이 쏟아졌다. 그래서였다. 그는 아무런 기대를 갖지 않고 뭐든 움직이는 것을 구경이나 할 요량으로 일어나 창가에 섰다. 그런데,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봤다. 그것도—실제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고작 몇 분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아주 오랫동안. 그 연구원은 이곳에서 본 사람들 중엔 굉장히 젊은 축에 속했고, 자신과는 다르게 매끄러운 회백색 머리칼을 가졌다. 그의 눈은 가벼운 듯 무거운 빛을 띠고 있어 저도 모르게 더 자세히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유리창에 얼굴을 가까이 하던 그때, 연구원은 별안간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바라봤다. 그리곤 그대로 그 앞을 지나가 복도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가 서 있던 자리는 유난히 휑뎅그렁했다. 

 그게 어딘가 보기 싫어져서 그만 침대에 누워버린 참이었다. 그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가 지워버리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바깥에서 평소보다 하나 더 많은 발소리가 들렸다. 드문드문 오가는 대화는 곧장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왜 갑자기 그런……” 

 “……마음에 들어서요, 그냥.”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거기에 답하는 처음 듣는 목소리. 실험실도 아닌 회복실에 여러 사람이 찾아오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담당이 바뀔 때라거나,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정도일까. 후자인 경우 그렇게 끌려 나갔다 오고 나면 한동안 크게 아팠다. M-N44는 몸을 움츠리고 문을 등져 누운 채 구겨진 이불을 품에 안았다. 제법 가까워졌는지 알아서 잘해봐, 따위의 분명한 말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문이 열렸다. 복도의 싸늘한 공기가 치료실 안을 한 차례 훑었다. 

 “안녕.” 

 그와 대조되는 나긋한 말씨가 뒤따라 인사를 건넸다. 문이 저절로 닫히며 다시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그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음색이 생각보다 듣기에 좋았다. 화나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즉, 무언가 잘못되어서 왔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그 사실이 M-N44의 경계를 조금은 누그러뜨렸으므로, 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새 방문자를 바라봤다. 

 “이름이 뭐야?” 

 “…….” 

 아는 얼굴의 청년이 눈을 휘어 웃으며 지척에 다가와 앉았다. M-N44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할 수 없었다. 말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소리 없이 동그래지는 소녀의 눈을 보고 그는 또 쉽게 웃었다. 꼭 같은 위치에 점이 찍힌, 뾰족한 눈매가 개구쟁이처럼 콩 내려앉았다. 예상했던 대로 웃는 낯이 퍽 잘 어울렸다. 음…… 그렇지, 실험체에겐 이름이 없지? 하며, 그는 들고 있던 일지 위에 굵은 펜으로 크게 글자를 썼다. 그 아래의 내용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자, 네 이름.”

 종이 한 면을 꽉 채운 큼지막하고 단순한 글자는,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식견으로도 간신히 읽어낼 수 있었다. M-N44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마……논.”

 “난 요시이 우쥬. 오늘부터 마논, 네 담당 연구원이야.”

 

*

 

 시야 가장자리에서 내리감긴 마논의 속눈썹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했다. 우쥬는 기록지를 내려두고 클램프를 조절했다. 영양 보충도 막바지였다. 지난번 실험에서 괴사한 조직을 떨쳐내느라 며칠 밤을 새운 뒤로, 마논에게는 한동안 수액만 맞히며 회복에 전념하고 있었다. 곧 다시 시작될 실험을 위해서라도 실험체의 상태는 최선을 유지해야 했다. 그는 손을 뻗어 마논의 뺨 위로 흩어진 머리칼을 조심히 걷어내 주었다. 처음 봤을 때는 거칠게 자라나 있었는데, 자꾸 만져주고 잘 먹였더니 이제는 제법 윤기가 나는 것이 썩 만족스러웠다. 

 잠시 불규칙적으로 빨라졌던 심박이 다시 제 속도를 되찾고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그 신호음은 이전에 듣던 것과는 달리 우쥬에게 묘한 안정감을 줬다. 마논의 손끝으로부터, 본질적으로는 그 심장으로부터 증폭된 고동이라는 점이 그랬다. 삐, 삐, 삐, 삐…… 초침 소리보다 조금씩 느리게 어긋나는 박동을 들으며, 우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분명 잠시, 였다고 생각했다. 

 “아.”

 흐린 시야 너머로 눈을 깜박이는 누군가가 보인다. 몇 번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자, 선명해진 얼굴이 멀뚱히 코앞에 놓였다. 우쥬는 반사적으로 미소를 그리며 기대 있던 벽에서 머리를 물렸다. 

 “……아, 마논. 깼어? 좋은 아……” 

 그리곤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켜며 비스듬한 채 몸을 굳혔다. 어깨에서 목으로, 살벌한 아픔이 뻗쳤기 때문이다. 건너편 벽에 걸린 시계는 벌써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지를 작성하던 자정 무렵으로부터 최소 한 시간쯤 지난 시각이었다. 설마 13시간을 잔 건 아니겠지, 터무니없는 생각을 밀어 없애고 있자면 조심스러운 손길이 목께에 다가와 닿았다. 마논이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우쥬, 아파……?” 

 그 손은 전혀 엉뚱한 곳을 어설프게 조물거렸다. 무심코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당연히, 그런 손짓은 결린 어깨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차라리 간지러울 만큼 따뜻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쥬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금세 마논의 손을 떼어내 버린 게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아냐, 괜찮아. 몸은 좀 어때?” 

 연구원으로서, 그는 마논에게 하릴없이 무거운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울어진 저울을 맞추기 위해 나름대로 우쥬로서의 호의를 듬뿍 얹어두고는 했던 것이다. 그 홀로 평형을 유지하는 저울에 반입자와 같은 실험체의 호의는 걸리적거릴 따름이다. 그뿐이었다. 

 “…….”

 그런 완곡한 거절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논은 순순히 손을 내리고 우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도 행동도 한참 없는 것으로 보아, 몇 초가량 고민해 봐도 특별히 아픈 곳이 없는 것 같았다. 마논의 가뜩이나 빈약한 어휘에서는 대부분의 긍정이 배제되어 있었다. 나면서부터 나쁜 경험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이로서는 좋은 것을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을 구사하지도 못하는 게 당연했다. 우쥬는 마논의 부정하지 않음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해졌다. 가볍게 숨을 뱉는 소리와 함께 우쥬가 앉았던 스툴이 바닥에 끌렸다.

 “그럼, 깬 김에 피만 조금 뽑아둘까?”

 “…….”

 “졸리면 꽂고 더 자도 괜찮아.”

 아량을 베풀듯 말해주자 돌아선 뒤에서 부스럭거리며 다시 눕는 소리가 났다. 우쥬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채혈기를 준비했다. 기록지의 체온, 혈압,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얼마 전까지 밤낮으로 고열에 시달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그의 회복력은 가히 경이로웠다. 그 건강을 궤도에 올리는 것도, 그리하여 다시 꺾어내는 것도 모두 우쥬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꺾어진 것을 그대로 영영 잃고 마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대비는 언제나 해둬야 했다.

 200mL 용량 팩을 집어서 왔을 때, 마논은 자리에 반듯하게 누운 채 팔을 내어두고 있었다. 하나짜리 눈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집요한 시선이 우쥬의 얼굴을 따라왔다. ……아하.

 “착하네, 마논.”

 그렇게 칭찬하며 머리를 쓸어주거든 마논은 달콤한 사탕을 물려줬을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조금이나마 눈에 총기가 돌았다는 뜻이다. 묘한 기분과 함께 우쥬는 가느다란 팔을 손에 쥐었다. 손목을 덮은 테이프를 떼어내고, 카테터를 뽑으면 피부 위로 오래된 주사 자국들이 군데군데 드러났다. 빈 구멍에 작은 반창고를 붙이고 팔을 동여매는 동안 마논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든 과정이 한없이 익숙하다는 듯. 우쥬 역시 여상히 차가운 에탄올을 닦아내며 상투적으로 일러줬을 뿐이다.

 “금방 끝날 거야~”

 

*

 

 그런 말과 함께, 바늘이 정맥 혈관벽을 부드럽게 꿰뚫었다. 이번에도 마논은 얌전히 팔을 내어뒀다. 단지 회복실과는 다른 실험실의 냉기에 이따금 몸을 잘게 떨고는 하는 것이 움직임의 전부였다. 관 속으로 역류한 미량의 피는 곧 불투명한 테이프에 가렸다. 카트 위에는 몇 주 전부터 조금씩 뽑아낸 마논 자신의 혈액 팩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수액걸이에는 아직 투명한 식염수가 걸린 채였다. 결벽적으로 새하얀 벽과 천장은 보이지 않는 짙은 혈향을 머금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아직 흐르지 않은 피의 냄새는 결국 몇 번이고 반복된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팔을 타고 퍼지는 이질적인 온도에 학습된 긴장이 마논의 어깻죽지를 굳혔다.

 “자아, 괜찮아. 힘 빼고. 응. 얌전히 있을 수 있지, 마논?”

 타이르는 손길이 굳은 어깨를 차분히 쓸어내렸다. 마논은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연구원이 적어도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희미하게 알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걸 본 우쥬는 웃음을 남겨둔 채 펜타닐의 용량을 쟀다. 마약성 진통제. 양이 조금이라도 초과된다면 숨이 멎고 말 터였다. 증량에 증량을 거듭한 끝에, 이미 사람에게 투여할 수 있는 한계치에 다다른 지가 오래인 까닭이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많은 보조 약제를 달고 왔지만, 그것들이 제 소임을 온전히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속 편한 예측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을 뿐이다. 얇은 표층이 눈금 안에 끼어들고, 깨끗한 수술용 톱에 비친 은색 조명이 흐드러져서야 실감이 났다. 마침내 정성껏 길러온 평화를 수확할 때가 돌아왔다고.

 “아, 으……”

 “쉿…….”

 움츠러드는 팔 위로 무게를 실어 찍어 누르다가,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 고정했다. 모든 과정은 오차 없이, 신속하게 이뤄져야 했다. 창백한 표피를 지나 붉은 진피를 가르는 메스의 감촉이 생소하면서도 낯익었다. 툭, 툭, 가녀린 섬유가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하얀 상완골이 웃옷을 벗어내는 동안, 심박을 알리는 신호음의 간격은 급격히 짧아지고 있었다. 마른 다리가 제자리에서 바르작거렸지만 거기에 어떤 의지가 담겼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심장으로 흘러드는 펜타닐 희석액이 날카로운 고통을 한층 먼 곳에 연명시키고 있었다.

 “으으……으.”

 “응, 으응. 조금만 참자.”

 친절한 말씨였으나, 부풀어 오른 열망은 그 목소리에서도 채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그는 지체 없이 톱을 긁었고, 제대로 발음되지 못한 숨소리가 헐떡이는 것을 그저 방관했다. 한 번, 두 번, 수술대 모서리를 힘껏 말아쥔 마논의 손가락에서 심박계가 조금씩 미끄러졌다. 어느새 초침보다도 더 빨라진 심박의 템포는 마치 비바체로 연주되는 황홀한 음악처럼 들렸다. ……아홉, 열, ……

 피가 흥건한 수술대 위로 끝내 톱날이 떨어졌을 때, 불투명한 장갑은 온통 뜨거우리만치 더운 피와 살점으로 뒤덮여 있었다. 우쥬는 오염된 장갑을 벗어 버리고 새 장갑을 손목까지 끌어내렸다. 그동안에도 마논의 호흡은 비탈길로 구르며 점차 식어가고 있었다. 완전히 분리된 왼팔과 어깨. 보통이라면 긴급히 수혈을 받아야 할 때였다. 그러나 우쥬는 혈액 팩을 집는 대신, 채워둔 주사기를 손가락 끝에 끼웠다. 그건, 감히 이르건대 이제까지 그와 마논이 만들어낸 것 중 최고의 역작이라고 해도 좋았다. 마논의 눈동자를, 혈액을 닮은 선홍빛의 액체가 절단 부위를 거침없이 침범하자 수술대가 크게 한 번 덜컹였다.

 “아…… 아……!”

 “괜찮아. 괜찮아, 마논. 자.”

 텅 빈 주사기를 카트 위로 굴려버리고, 버둥거리는 마논의 몸뚱이를 꾹 끌어안으면 고여 있던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남은 오른팔에 연결된 관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통에 꼬이지 않도록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분열에 의한 신경통이 원래의 생리적 통증을 집어삼키고 진통제의 약효를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아, 아, 아으아…… 울음에 가까운 소리가 쥐어짜 내듯 아무렇게나 토해졌다. 손톱 끝을 퉁기고 떨어진 심박계가 바닥을 굴렀다. 둔탁한 소음은 실험실 안에서 울림조차 되지 못한 채 사그라졌다. 우쥬는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그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인내했다.

 

*

 

 그날도 어김없이 해가 떴다. 그랬을 거라고, 지하 연구소에서 우쥬는 멋대로 추측했다. 그렇지 않고야 마논이 이토록 찬란한 빛깔을 틔우는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간 자리에 새순이 움트듯, 그의 팔에는 벌써 원시적인 하완의 형태가 자리 잡았다. 발그스레한 맥동이 아직은 수줍었지만 분명 알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적어도 사흘 안에 수복이 끝날 것이다. 여기서 연구를 시작한 이래로 이런 속도는 처음이었다. 힘껏 달리던 사슴을 날아 잡을 듯 기록지를 채우는 우쥬의 손이 빨라졌다. 2053년 4월 4일, M-N44, 담당자 요시이 우쥬, ……, 이어 마논에 대한 숫자와 단위들을 나열하던 그는 문득 어떤 기시감에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내용을 거슬러 올라간 시선은 가장 위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때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기분이 퍽 좋아진 우쥬는 정성껏 휘갈겨 내용을 마저 채운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음……”

 하지만 그를 막는 손길이 있었다. 그새 깨어서 우쥬의 가운 자락을 쥔 마논이 불분명한 발음을 웅얼거렸다. 다 뜨지 못한 눈이 애를 써가며 우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그는 곧 마논의 뜻을 이해했다.

 “안 돼~ 미팅이 있어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금방 돌아올 테니까.”

 마논의 눈썹이 조금 아래로 처졌다. 시무룩해지려는 그를 살살 달래서 떼어놓은 끝에, 우쥬는 복도로 나와 걸었다. 그러나 회의실은 이번 행선지가 아니었다. 그의 걸음은 화창한 해가 떠 있을 지상으로 향했다. 이제는 마논의 언어에 ‘좋은 것’을 하나쯤 만들어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을 하며.

 

 문이 느리게 닫히고 나면, 회복실 안에는 마논이 이따금 내는 앓는 소리만이 외롭게 남아 맴돌았다. 잘린 팔이 참을 수 없이 가려웠다. 동시에 쓰라렸고, 차가우면서 뜨거웠고, 쥐가 난 듯 통증이 엉키기도 했다. 제어할 수 없는 경련이 간헐적으로 불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찾아왔다. 마논은 습관적으로 침대 옆을 더듬어 진통제를 주사하는 버튼을 눌렀지만, 아마도 더는 투여가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몇 번 더 힘없이 버튼을 눌러보던 마논은 이내 약을 쓰기를 포기하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대신에 그럭저럭 빈 자리를 채울 만한 물건을 베개 아래서 꺼내기로 했다. 구깃구깃한 종이 한 장이었다. 2052년 4월 4일, 로 시작하는 기록지 위에는 다른 모든 내용을 제치고 커다란 글씨로 ‘마논’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픔이 도무지 가시지 않을 적마다 꺼내 본 탓에, 여기저기 손때가 타고 닳아 있기도 했다. 실은 고작 이면지 상자에서 훔쳐 온 복사용지에 불과했지만, 다른 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건 마논에게 있어 처음으로 생긴 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결코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물건을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으니.

 거친 획들을 하나씩 매만지던 도중, 돌연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마논은 흠칫 놀라서 종이를 도로 베개 아래 쑤셔 넣어버렸다. 익숙한 발소리는 우쥬의 것이었다. 미팅이 있어서 간 것치고는 귀가가 이르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챈 마논은 일어나 앉은 채 모퉁이를 주시했다. 안으로 들어온 우쥬는 머리와 어깨가 조금 젖어 있었는데, 그보다 눈에 띈 건 품에 감싸 안아 들고 있는 작은 상자였다. 낯선 모양새였다.

 “아~ 하필 비가…… 응? 마논, 아직 깨어 있었네.”

 그는 젖은 머리를 털다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보란 듯이 눈앞에 상자를 내려놓는 것이었다. 마논은 하얗고 은박 장식이 덮여 있는 말끔한 그것과, 축축해져 있는 우쥬를 번갈아 한 번씩 바라보았다. 하나밖에 없는 눈이 고양이처럼 바쁘게 움직였다. 우쥬는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그제야 마논은 손을 뻗어 상자를 한참 만지작거렸다.

 “여기, 들어간 곳 보이지? 눌러서 여는 거야.”

 “……!”

 헤매던 손가락이 다른 손의 인도에 따라 작은 홈에 안착했고, 상자의 옆구리는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건 동그랗게 포장된 작은 홀 케이크였다. 정갈한 슈가 파우더와 생크림 위에 딸기와 블루베리가 조화롭게 얹혀 있는. 마논으로서는 일생에 잘린 조각이나 겨우 구경해 봤을까 싶은 것이었다. 과분할 만큼 무결해 보이는 흰 표면을 눈에 담은 마논은 또다시 말을 잃었다.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없었다.

 “마논의 첫 번째 생일, 오늘로 할까 하고.”

 “생일……?”

 “으음, 그러니까~ 오늘은 마논을 위한 날인 거야.”

 “…….”

 당연히, 생일이라는 단어를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마논에게도 돌아오리라는 기대는 해본 적이 없었다. 태어난 날도, 이름도, 부모도 모르는 고아. 연고 없는 실험체, M-N44. 그게 자신이었으니까. 마논이 팔의 통증마저 잊은 채 멍하니 케이크를 내려다보는 동안, 우쥬는 조명을 끄고 익숙한 손짓으로 성냥불을 켰다. 하나뿐이었던 불빛은 곧 둘로 늘었고, 완연히 타오르게 된 초 하나가 케이크 위를 밝히며 딸기 옆에 꽂혔다. 어두워진 공간 속에서 두 사람은 흔들리는 작은 불빛에 의지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 좋은 날이니까.”

 “아…….”

 가까운 곳에서 생경한 초의 열기가 아스라이 전해져 왔다. 그런 따스한 웃음이 우쥬에게도 노란빛으로 그려져 있었다. 마논의 빨간 외눈도 지금이라면 조금은 따뜻한 색을 띠었을까. 오늘이 좋은 날이라면, 우쥬는 좋은 사람이라고,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생일 축하해, 마논.”

 4월 4일, ‘마논’이 존재하게 되었던 날. 처음으로, 마논은 우쥬와 꼭 닮은 표정을 지었다.